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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하는곳

우키요에 장광설

'우키요에(浮世繪)'는 일본의 '에도시대(江戶時代)'를 대표하는 회화양식이다. '에도시대'란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조선후기에 해당하는 일본의 사무라이 시대를 말한다. (대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가 들어선 1600년 경부터 메이지유신 직전인 1868년까지를 일컬음) 이 당시에 일본에서는 우키요에라는 풍속화가 유행하였는데, 일본문화를 대표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다.

 

'우키요(浮世)'라는 말은, 마치 유행가 가사처럼, '먼지처럼 떠다니는 세상', 즉 '속세' 정도로 해석하면 적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키요에(浮世繪)'는 말 그대로 그러한 속세의 모습들을 그려낸 그림이 된다. 아닌게 아니라 그 소재들은 무궁무진해서, 자연풍경이나 정물, 동물화는 물론,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설명화나 사람들의 일상생활, 유곽의 미인들, 가부키 배우들의 초상화, 심지어 낯뜨거운 춘화(春畵)에 이르기까지 벼라별 그림들이 다 포함된다.

 

그렇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우키요에라는 말은 그림의 '내용(소재)'을 나타내는 장르적 개념이 아니라, 그림의 '형식'을 나타내는 고유명사이다. 이때 그 형식은 '판화'를 가리킨다. (즉 '우키요에=일본의 채색판화')

 

 

 

판화? ...  웬 판화?

 

 

 

그러게 말이다. 하여튼 일본사람들은 대단하였다. 우리가 비단종이 펼쳐놓고 먹 갈아서 한줄한줄 힘주어 글씨쓰고 그림그리고 할때, 아예 원본 하나 만들어 놓고 그걸로 여러장을 뽑아 돈많이 벌겠다고 판화를 발전시킨 거 아니겠느냐... 쳇!...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가면 '기타가와 우타마로 (喜多川歌麿, 1753~1806)' 라는 사람의 우키요에 작품 하나가 떡~ 하니 걸려있다.

 

 

 

 

 

제목 : 위층방의 연인들 (1788년 경)

 

 

 

 

이것은 전통적인 동양화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 보았을 때 (아니, 온갖 서양화풍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자못 충격적인 그림이 아닐 수가 없다. 일단 주인공들의 눈코입이 보이지 않는 뒷모습 구도가 파격적이다. (자세히 보면 남자 주인공의 눈 하나는 찾을 수 있음 ^^) 마치 다른 사람들 몰래 은밀한 곳에서 밀정을 나누는 그 시대 동양연인들의 심정같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놀랍게도 이들 남녀는 이미 많은 부위가 노출된 상태이다. (여자의 엉덩이 부분과 남자의 다리부분이 보이면서... 순간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보게 되는...) 그리고, 그러한 인물들의 윤곽선은 극도로 단순하게 처리하면서, 그들이 입고있는 옷 무늬는 어지간히 세밀하게 그려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다른 어떤 그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매력이 느껴진다. 게다가 저것을 판화로 찍었다니...  어쩐지 신비로운 그림이다.  

 

 

 

 

 

 

저 그림을 그린 우타마로는 여러 종류의 '미인도'로 특히 유명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들은 거의 일본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보건대, 아마도 여염집 규수들이 이러한 그림의 모델이 돼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그림들의 주인공은 대부분 유곽의 여인들이고, 그 목적도 평범한 '순수감상용'을 벗어난 '염정분출용'이었으리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요즘 남학생들이 여자연예인 비키니사진 구해가지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유명 기생들을 이러저러한 포즈로 그려놓은 그림들은 남성고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판화로 제작하게 되었을 테니, 우키요에는 본질적으로 예술이라기 보다는 광고, 포스터, 저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키요에의 상당수는 지금 보아도 농도가 진한 '춘화집' 형태로 발간되었고, 유명작가들의 대부분이 그러한 춘화들을 그려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까 소개한 <위층방의 연인들>도 우타마로의 춘화&시집 가운데 일부임)       

 

 

 

하지만 ... 

그 예술성은 정말이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역시 우타마로의 대표작, <거울을 보며 화장하는 여인>

거울을 통해 보이는 간접적 이미지,

긴 목 뒤로 올라와 흰 분을 바르는 그녀의 손,

고운 머리카락과 살짝 내려간 어깨선의 아름다움...

 

 

 

 

 

 

 

 

'도슈샤이 샤라쿠(東洲齋寫樂)'라는 수수께끼의 화가가 있었다. 역시 에도시대에 활약했던 우키요에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흥미로운 건 그와 관련된 모든 내용들이 지금껏 미스터리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1794년 5월 어느 날, 에도(지금의 동경)의 극장가에 나타나 10개월 남짓 140여점의 작품을 그리는 왕성한 활동을 보이다가 (그는 주로 가부키 배우들을 그렸다.)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려서 행적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그의 생몰년은 물론,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 어디로 가서 어떻게 돼버렸는지 지금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

 

 

 

 

샤라쿠의 대표작 <오타니 오니지(大穀鬼次)>

 

당시 유명했던 가부키 배우 오타니 오니지 2세를 그린 것인데,

 이 그림 한 장은 일본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동경 국립박물관 소재)

 

 

 

샤라쿠의 정체를 찾기 위한 일본의 전문가들의 노력은 계속됐고, 실로 여러가지 학설들이 제기됐다.

(일본에서는 샤라쿠를 연구하는 학자들만큼 샤라쿠가 많다는 말도 있다 ^^)

그리고 그것을 소재로한 추리소설, 넌픽션, 팩션 등도 쏟아져 나왔다.

 

국내에도 <샤라쿠 살인사건>(다카하시 카츠히코 저)이라는 추리소설이 번역출간된 바 있고,

일본에서는 한일비교문화연구소장인 이영희씨가 <또 하나의 샤라쿠>라는 책을 일어로 출판한 적도 있다. 여기에서 그는 샤라쿠가 조선의 화가인 단원 김홍도라는 놀라운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단원이 179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정조의 밀명을 수행하며 샤라쿠라는 화가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당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훈민정음 암살사건> 등의 팩션을 써 온 작가 김재희는 최근 <색, 샤라쿠>라는 신작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는 샤라쿠가 단원 김홍도가 아닌 혜원 신윤복이라는 이론에 근거해 스토리를 펼쳐나가고 있다.

 

 

 

 

 

 

 

"처음에는 단원이 연풍현감 재임 당시 일본에 건너가

샤라쿠라는 풍속화가로 활동했다는 가설을 토대로 소설을 쓸 작정이었다.

하지만 단원과 관련된 자료들을 연구하다 보니

이미 50대에 접어든 그가 그처럼 떠들썩하게 활동하면서

과연 의심받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혜원 신윤복이 단원의 그림을 굉장히 많이 모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기록에는 없지만 사제지간이었음이 분명했다.

게다가 혜원이야말로 샤라쿠와 그림의 성향이나 소재가 비슷해보였다.

나는 혜원이 샤라쿠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이 생각은 여러 미술 사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면서 확신으로 굳어졌다."

- 김재희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쨌든 이 시대에 특정 연예인을 그린 초상화들이 제 값을 받고 판매되었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라. 오타니 오니지가 됐든 기무라 타쿠야가 됐든, 당시 가부키 배우의 모습을 10개월 동안 140장 그려서 대박을 낸 화가가 있다면, 그 그림들이 그만큼 불티나게 팔렸다는 이야기 아닌가? 이 시절 도쿄에서 이미 스타의 '브로마이드' 산업이 활성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예술은 산업을 먹고 자란다. 우키요에 역시 그러한 경제적 환경 속에서 발전을 거듭하면서 또 한 사람의 대가를 탄생시켰다. 바로  '가츠시카 호쿠사이 (葛飾北齋, 1760~1849)'라는 인물이다.

 

 

 

 

 

호쿠사이의 대표작, <부악36경(富嶽三十六景)> 중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

 

 

 

 

 

 

일본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저 파도는 어디선가 한번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일본에 가면 아줌마 고무신에도 저 그림이 찍혀있고,

최첨단 노트북에도 저 그림이 찍혀있다. 

 

 

 

 

 

 

도쿄의 그의 생가가 있던 지역은 아예 그 이름을 따서

'호쿠사이 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지하철 '호쿠사이길' 역 주변은 그의 그림들로 장식돼 있다.

 

 

 

 

 

일본인들이 좀 오바하는 것 같지만, 나는 호쿠사이라면 저 정도 칭송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덕분에 우키요에의 질과 명성이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고, 이제부터는 당시 그들의 산업적 배경을 부러워할 게 아니라 예술적 수준을 부러워해야 하는 단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또다른 대표작 <붉은 후지산>을 보자.

 

 

 

 

<부악36경(富嶽三十六景)> 중 <쾌청한 날>, 일명 <붉은 후지산>

 

 

 

<부악 36경>이란 일본 '후지산(한자로는 '부악'이라고도 씀)' 일대의 명소 36곳을 돌아다니며, 그곳의 대표적인 경치들을 뽑아 우키요에로 만든 일종의 그림책으로, 오랜 답사와 제작기간을 통해 완성한 역작이다. (1823–1829년 제작)

 

이것은 요새로 따지면 여행 팜플렛이나 관광 안내책자, 혹은 명소 사진집 정도의 구실을 하였던 책이었다. 사람들은 이 책을 가지고 36장의 황홀한 경치를 감상하였다가, 친구들이 집에 찾아오면 펼쳐 보여주며 대화를 나누었다. 유명한 기생이나 가부키 배우들의 브로마이드 사진보다는 확실히 진일보한 예술생활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공전의 히트를 쳤고, 이후의 우키요에 화가들은 너도나도 호쿠사이를 좇아 대작중심, 화집중심의 작업으로 선회하게 된다. 나중에 소개할, 히로시게의 <에도 100경> 같은 걸작이 나오게 된 배경도 그것이다.    

 

 

 

 

 

나는 감히, 에도시대 사람들이 호쿠사이를 통해 '예술로서의 우키요에'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그전까지의 모든 우키요에는 예술화가 아니라 실용화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저 후지산을 저렇게 새빨갛게 찍어냈을까?

 

 

 

 

 

 

다른 그림을 한 장 더 보자.     

 

용량 차이가 좀 있지만, 아까랑 똑같은 <후지산>이다.

 

 

  

 

 

 

둘은 완전히 같은 작품이다. 그런데 전혀 달라 보인다.

 

 

 

왜?

 

 

판화이기 때문이다.

아까는 새빨간 안료를 썼고, 지금은 붉그죽죽한 물감을 썼기 때문이다.

당시 판화의 특성상 찍을 때마다 느낌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어떤 잉크, 어떤 종이를 쓰느냐에 따라 색감에는 큰 차이가 난다.

 

 

 

 

그림의 좌상단 부분에서 제목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한자로 표기된 이 그림의 원제는 그냥 '개풍쾌청(凱風快晴)'이다. <후지산의 36가지 풍경> 가운데 그제 '맑은 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통상 '붉은 후지산(赤富士)'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 작품이 본래부터 새빨갛게 제작된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 그림의 색깔이 점차 그쪽으로 진화하였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아마도 그것은 사람들의 선호와 여론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이 이책 저책 펴놓고 비교 감상하면서 진지한 감상평들을 늘어놓았을 것이고, 출판업자들은 대중들의 그러한 예술적 취향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에 맞는 색감과 질감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우키요에는 실제로 어느 출판업자가 만들었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후대에 가면 작품명 뒤에 '000판', '###판'하는 식으로, 출판업자명까지 붙는 걸 볼 수 있다.)

 

우키요에를 상징하는 생생한 채도의 색깔들은 바로 이러한 예술적 체험과정들을 통해 확립되었으리라 본다. 당시 우키요에는 대중들의 심미안을 높여주는 중요한 문화적 매체가 된 것이다.

     

 

 

 

 

여기까지 왔다고 해서 우키요에가 완전한 예술작품이 됐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키요에는 영원히 실용적(?)인 면모를 지키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춘화인데, 호쿠사와 같은 대가 역시 수많은 춘화를 그려왔다는 사실을 인터넷 몇번 때려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심히 민망한 관계로

그 가운데 딱 한장만 소개하겠다...

 

 

어부 아내의 꿈 (1820년 경)

 

 

 

 

 

에도 막부의 말기인 1853년, 일본은 美 페리제독이 이끌고 온 군함에 의해 최초로 서양과 만나게 되었고, 이후 '개항'이라는 대사건을 겪으며 급속하게 세계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서구세계에도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는데, 그 창구가 된 것이 당시 유럽에서 자주 개최되었던 '만국박람회'였다. 특히 1855년부터 1900년까지 거의 11년에 한번씩 개최되었던 파리의 만국박람회(1855, 1867, 1878, 1889, 1900)는 일본의 우키요에가 프랑스 화가들에게 알려지게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최초의 우키요에가, 당시 박람회장 안에서 '당당히' 전시되어 알려진 것이 아니라 포장용으로 사용되었던 폐품들 속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만국박람회에 내놓았던 물건들은 주로 공예품과 도자기 등이었는데, 이것을 포장하는 과정에서 완충용으로 우키요에가 그려진 종이들이 사용되었던 모양이다. (마치 택배보낼 때 물건 깨지지 말라고 신문지 여러 장을 같이 구겨넣듯이... ^^) 한 기록에 따르면, 이 귀중한 발견을 최초로 한 사람은 판화가인 펠릭스 블라크몽(Felix Braquemond)이었다고 하는데, 그가 호쿠사이의 작품을 우연히 찾아낸 뒤 이를 마네, 드가, 휘슬러 등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여주어 이후 우키요에의 붐이 일어났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키요에라는 장르가 '판화'였기 때문에 겪게 되는 놀라운 숙명들을 느끼게 된다. 만약 그 녀석이 일반적인 다른 회화들처럼 '육필화'였다면 그처럼 외국까지 건너가 우연히 발견될 수 있었겠는가?  단지 대량생산으로 만들어진 싸구려 인쇄물이었기 때문에 우수마발()처럼 취급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역만리까지 건너가 새롭게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제대로 된 작품이었겠는가? 아마도 판화 인쇄과정에서 에러가 난, 실패작 쪼가리들이었을 것이다. 그걸 보고 신기해하고 좋아라 했을 프랑스 코쟁이 친구들이 떠오른다. 쩝...)     

 

우키요에를 보면 '아메리칸 드림'을 능가하는 '자판 드림'이 느껴진다. 빈민굴 출신의 헝그리 복서가 세계를 제패하는 챔피언이 되는 꿈같은 이야기처럼, 유곽의 기생이나 남녀상열지사들만 그렸던 속되고 상스러운 통속화가, 어느덧 유럽의 화단 가운데에서 사랑받는 최고의 애장품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우키요에와 일본에 빠진 건

화가들 뿐 아니었다.

 

            

       

 

일본이라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심과 동경이 폭넓게 일어났다. 처음에는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던 일본문화 붐은 곧 사회 각부분으로 확대되었다. 상류사회의 여인들은 일본풍의 의상을 입고 싶어했고, 수집가들은 앞을 다투어 일제 공예품을 사들였다. 일본과 일본문화에 대한 심취를 가리키는 '자포네즈리(Japoneserie)', 또는 '자포니즘(Japonism)'이라는 신조어들도 등장했다.    

 

 

 

 

 

티소, <일본 물건을 구경하고 있는 아가씨들> (1869)

 

 

 

 

 

 

 

 

 휘슬러, <금보라(金紫)를 입은 카프리스 2번, 금막(金幕)> (1864)

 *  휘슬러는 이처럼, 자기 작품 제목을 음악용어틱하게 붙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 속 여인이 감상중인 (그리고 오른쪽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품들이 바로...

나중에 소개할 히로시게의 <에도100경>이다!

 

 

 

 

 

 

 

 

 

우키요에가 프랑스의 젊은 화가들을 사로잡은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당시 그들은 진퇴양난의 늪에 빠져있었다. 일단 화가로 데뷔하기 위해서는 선배들이 정해놓은 보수적인 지침들을 따라야만 했다. '살롱전'이라는 전시회에 출품하여 실력을 인정받아야만 했고, 아카데미 회원들이 제시하는 고전 미술의 미학적 원리와 기준에 따라 일정한 양식의 화풍을 모사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 '사진'은 '그림'에 대한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당시 사진술의 발명은 회화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가족 초상화 한장을 얻기 위해 화가의 작업실을 찾아가 많은 돈을 주고 수십시간을 힘들게 앉아있어야 했던 사람들이,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사진의 등장은 분명, 고전적인 화풍의 기존회화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출구는 무엇일까? 파리의 젊은 화가들은 그것을 일본의 채색판화에서 찾은 것이다.

 

   

 

 

단순한 선과 구도, 그리고 생생한 색이

인상파 화가들을 사로잡았다.

 

 

 

 

 

 

 

 

 

모네, <일본의상을 입은 카미유> (1876)

 

인상파의 거장 모네가 자신의 아내 까미유에게 기모노를 입히고 그린 그림

 

 

 

 

 

 

 

 

 

마네, <에밀 졸라의 초상> (1868)

 

소설가이자 평론가였던 졸라는

인상파의 대부 마네의 친한 친구였다.

졸라의 서재로 보이는 이 그림의 배경에는

여자모델을 이상하게 벗겨놓았다고 당시 숱한 비난을 받았던

마네의 작품 <올랭피아>도 조그맣게 보인다. (우상단)

하지만 역시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그들이 좋아해 이곳에 걸어놓은 일본그림들이다.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대학교에서 미술사의 기본교재로 애용되어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곰브리치(Gombrich)의 <서양미술사 (Story of Art)>를 보면 '인상주의'에 대한 설명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세기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눈으로 세계를 보도록 도와주었던

두 가지 동맹자가 없었던들

 

아마도 인상주의의 승리는

그처럼 빠르고, 그처럼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동맹자 중 하나는 사진술이었다.

 

두번째 동맹자는 일본의 채색판화였다.

 

 

 

 

 

 

 

참으로 정확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 

 

 

 

 

 

 

 

 

 

 

고흐, <탕기 아저씨의 초상> (1868)

 

 

줄리앙 탕기(Julien Tanguy)는 파리의 미술품상이었다.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던 고흐는 그의 그림 가게에서 우키요에를 처음 접하고, 빠져들게 되었다.

탕기는 고흐에게 많은 일본화들을 복사해주기도 하였는데,

이 그림은 그러한, 탕기 아저씨와 우키요에에 대한 고흐의 '오마주 (hommage)'이다! 

(뒷면을 벽지처럼 도배하고 있는 그림들은 모두 실존 우키요에 작품들이다.)

 

 

 

고흐는 우키요에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어려운 살림에 직접 돈을 들여 사모으기까지 하였다.

그가 수집한 477점의 우키요에는 현재 네덜란드 국립 고흐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나는 모든 일본 미술품에서 보는 것처럼 
순수하고 극단적인 명료함을 원한다.
그것은 결코 단조롭거나 허둥대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마치 옷의 단추를 끼우는 것처럼 단순하고 손쉽게,
일본 화가들은 몇개의 분명한 선으로 형상을 만든다.

- 반 고흐

 

 

 

 

 

 

 

 

 

놀라운 사실은 그가, 특정인의 우키요에 작품을 똑같이 베껴그리기까지 했었다는 사실!

 

 

 

 

 

히로시게의 '가메이도의 자두나무' (좌) 와 고흐의 모작 (우)

 

 

 

 

 

 

 

 

 

히로시게의 '아다케 대교에 내리는 저녁소나기' (좌) 와 고흐의 모작 (우)

 

 

 

 

 

 

처음 본 사람들은 약간 충격을 받기도 한다.

천하의 반 고흐가 일개 일본 화가의 그림을 똑같이 베껴그렸다니?!

(심지어 뜻도 모르는 한자어까지 그대로 그리려 했다는...)

 

 

 

 

도대체 이러한 그림을 그린 '히로시게'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다음 포스트를 기대해 주세요~

 

 

 

 

 

 

 

 

 

 

 

 

 

 

 

 

 

 

(후기)

 

 

 

우키요에는 이후 일본에서 어떻게 되었을까?

 

 

 

...

 

 

 

 

정답!

 

지금까지 잘 발전해 오고 있다.

 

 

 

 

 

 

 

20세기 이후에도 변하지 않고 살아있는 현대판 우키요에 작품들을 보면, 

 

그것이 '저패니메이션(일본 애니메이션)'과 얼마나 닮아있는가 알 수 있다.

 

 

 

 

 

 

Kawase Hasui, <Kasuga Shrine in Nara> (1933)

 

 

 

  

 

 

 

Kawase Hasui, <Zaimoku Island, Matsushima> (1933)

 

 

 

 

 

 

 

 

 

 

결국 현재 일본의 막강 파워를 자랑하는 애니메이션 역시

그들의 저질 목판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예술의 발전에 있어서 '산업'과 '상업'은 중요한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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