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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하는곳

루벤스가 만난 조선인

지금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루벤스, 바로크 걸작선>이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고 한다.


신문보도를 보다가 문득,

그의 미스터리한 작품에 얽힌 이야기 하나가 생각나

이 포스트를 쓴다.


                                   부디 나한테만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피터 폴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1640)

 

바로크 시대 제일의 화가, 플랑드르 (지금의 벨기에) 출생

21세 때부터 안트베르펜 화가조합에 당당히 가입되어 활동했다.

23세 때인 1600년부터 8년간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왔고,

최고화가의 찬사를 받으며 금의환향했다.

1609년 플랑드르 총독 알브레흐트 대공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이후 화려한 명성 속에서 장대한 예술세계를 펼쳐나갔다.

 

 

 

나는 어렸을 적 <플란다스의 개>라는 동화책과

만화영화를 통해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가난한 우유배달을 하면서 화가의 꿈을 키우던

주인공 네로가 평생 보고 싶어 했던 것이

루벤스의 그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작품들은 평소 성당 안 커튼 속에 감춰져 있어

‘금화 한 닢’을 내야만 볼 수 있었다.

 

가난해서 금화 한 닢이 없던 네로는

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성당 안에서 죽기 직전, 드디어 그것들을 보게 된다.

 

 

 

 

*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 중에서...

 

 

 

 

브뤼셀 다음가는 벨기에 제2의 도시인 

안트베르펜(영어로는 '앤트워프')에는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 하나 있는데

<플란다스의 개>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그곳은 현재까지, 동화의 내용처럼 루벤스의 명작들을 소장하고 있다. 

 

 

 

* 안트베르펜 대성당과 그 앞에 세워진 루벤스 동상

 

 

 

 

 

 

 

 

*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루벤스의 <십자가를 세움 The Raising of the Cross> (1609-1610)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비교해 보면 크기에서부터 얼마나 대작인지 알 수 있다. 

 

 

 

 

 

 

 

* 같은 성당 안에 있는 또 다른 걸작품 <십자가에서 내림 Descent from the Cross> (16120-1614)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이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거장이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어느 조선사람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

 

 

 

 

 * 루벤스, <조선남자 Korean Man>, 드로잉, 38.4cm*23.5cm, 폴 게티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소장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의 해설을 한번 들어 보자.



복식을 제대로 갖춘 한 조선인을 그린 이 초상화는

루벤스가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완성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연습용이나 다른 큰 작품의 부분용이 아니라는 의미)

 

당시 유럽과 조선 사이에는 교류가 거의 없었으므로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하던 루벤스가 어떻게 조선인을 만날 수 있었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루벤스는 그림 속 모델이 멀리서 온 이방인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 배경에 작은 범선 하나를 그려넣었다.

(왼편 배경에 희미하게 그려져 있음)

 

하지만 그러한 디테일보다 루벤스가 더 관심을 가졌던 건

주인공이 입고 있는 옷이었다.

 

이 드로잉은 루벤스가 그린 가장 꼼꼼한 초상화 가운데 하나이다.

인물의 얼굴 위로 더해진 하일라이트가 표정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있다.

옷감 위를 흐르는 빛에 매료된 루벤스는

주인공 옷의 명암을 표현하기 위해 부드러운 목탄을 사용하였고,

종이의 흰 여백을 이용해 이를 잘 살려냈다.

 

이 작품은 후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이라는 작품 속 등장인물에 영향을 주었다.  



 * 번역은 내가 직접 했다 ^^

  원문이 궁금하신 분은... 

http://www.getty.edu/art/gettyguide/artObjectDetails?artobj=58


 

 

 

조선이라는 나라가 유럽에 알려지게 된 것은

잘 아시다시피 <하멜표류기> 때문이다.

 

하멜이 국내에 표착한 것은 1653년,

오랜 억류생활 끝에 탈출한 것은 1666년,

귀국해서 <하멜표류기>를 세상에 내놓은 것은 1668년의 일이다.

 

루벤스는 1577년에 태어나 1640년에 죽었으니

하멜이 누군지, 조선이 어떤 나라인지 당연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관모를 쓰고, 머리를 틀어 올리고, 소매통이 넓은 한복을 입은

전형적인 조선인을 만나 그의 초상화까지 그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림 속 모델이 누구인지를 암시하기 위해 배경에 범선까지 그려넣었다.

이것은 그가 배를 타고 멀리서 온 내도인(來到人)이라는 의미이다.

 

당시의 초상화에서는 그림 속 모델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기 위해

배경이나 소품 가운데 그 인물을 상징하는 요소를 첨가했다.

예를 들면 재봉사에게는 가위를, 상인에게는 돈주머니를,

학자에게는 책을 그려넣는 식의 방법들로...

 

그렇다면 우리는

그림 속 인물이 당시 유럽으로 건너 가서 활동하고 있던

매우 드문 케이스의 조선인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윌리엄 베일리(William Baillie)라는 아마추어 판화가가 제작한 루벤스 그림의 모사 동판화 (1774)

사진이 개발되기 훨씬 전이었던 당시에는

중요한 미술작품들을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판화로 인쇄해 배포하곤 하였는데

이것도 그 중 하나이다.

여기에서는 루벤스의 원작이

"1636년 영국 찰스 1세 궁정에 왔던 사이암의 대사(Siamese Ambassador)"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여러가지 오류로 보인다.


원문설명은...

http://www.getty.edu/art/gettyguide/artObjectDetails?artobj=380







 

잠깐, 한 가지 더 밝히고 가야할 내용이 있다.

아까 읽은 해설에 나오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이라는 작품이다.

 

 

 

* 루벤스, <성 프란체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1618) 빈 미술사 박물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St. Frnacisco Xavier, 1506-1552)는

인도와 일본에 기독교를 전도한 예수회 선교사이다.

 

온갖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먼 동양땅에서 선교에 성공한 

기독교 성인(聖人)의 업적을 루벤스가 유화로 그려낸 것이다.  



 

 

* 인도 고아(Goa)의 '봄 지저스 대성당'에는 하비에르 성인의 무덤과 시신이 있다.

그의 유해는 사후 400년 동안 썩지 않는 기적으로 유명한데, 10년에 한번씩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고 한다.

  

 

 

어쨌든...

이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가운데 <조선남자>의 이미지가 숨어있다는 사실!

 

 

그림의 중앙, 아랫부분에 있는 이 사람...

옷과 모자, 자세 등이 똑같다!!

 

 

 

 

재미있는 것은

본래의 구성상으로는 '조선남자'자리에 '아랍남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의 모델로(Modello).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모델로'란 완성작이 만들어지기 전 의뢰인에게 미리 보여주는 간단한 예비작품을 말한다.

돈을 내고 궁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의뢰인에게 '이런 그림을 그려드릴게요'하고 내보이는 일종의 '맛뵈기'인 셈이다.  

 

 

 

여기에서는 조선남자 자리에 터번을 두른 아랍인의 모습이 보인다.

본래 아랍인으로 그리려 했다가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 '선수교체'를 한 것이 틀림없다.  

 

 

 

 

 

 

하긴... 하비에르 성인은 '아시아'에서 선교활동을 한 사람이다.

 낯선 아시아의 이방인들을 그려넣어야 분위기를 살릴 수 있을텐데

그러기에는 '조선남자'가 적격이지 않았겠는가?

 

 

* 최종 완성작에 그려진 '조선남자'

 

 

 

 

 

 

 

* 최종 완성작을 자세히 보면 '일본남자'도 있다.(중앙, 왼쪽 끝) ㅋㅋㅋ

 

 

 

 

어쨌든 <조선남자>는 <하비에르의 기적>보다 먼저 그려진 게 틀림없다.

언제, 어디선가, 조선에서 왔다는 특이한 이방인을 만나 부랴부랴 스케치를 해 두었고,

<하비에르의 기적>을 그리다보니 아이디어가 떠올라

그때 그려둔 그림을 바탕으로 군중 속의 한 사람으로 재연해냈을 것이다.

 

 

 

...

 

 

 

자, 이제 미술수업을 마치고 역사수업을 시작해 보자.

 

과연 그림 속 주인공이 되었던 조선의 남자는 누구였을까?

우리는 그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까?

 

...

 

 

 

 

 

1979년 10월 7일 <한국일보>에는 놀라운 기사가 하나 실렸다.

 

이탈리아 남부의 '알비(Albi)'라는 작은 마을에

 

'코레아(Corea)'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이 200명 정도 집단 거주하고 있는데,

 

그들은 '안토니오 코레아(Antonio Corea)'라는 조선인을 시조(始祖)로 한다는 것이다. 

 

 

 

 

 

 

안토니오 코레아는 본래 임진왜란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소년이었는데

당시 일본에 도착했던 '프란체스코 카를레티(Francesco Carletti)'라는 이탈리아 상인을 따라

로마로 들어와 이탈리아에 정착했다고 한다.

 

 

 

 

 

* 근거가 된 카를레티의 <나의 세계일주기> (1701)

이 책 가운데 카를레티가 일본에서 조선인 소년을 노예로 샀고,

그는 현재 안토니오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살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혹시

루벤스의 그림 속 '조선남자'는 안토니오 코레아가 아니었을까?

 

 

 

 

 

실은 그 동안 적지 않은 매체를 통해 안토니오 코레아에 관한 이야기들이 소개되었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비마을과 코레아 성씨들에 대한 취재가 계속되었고,

역사소설이나 뮤지컬을 통해 재구성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루벤스의 그림 속 주인공과의 연관성을 다룬 연구는 많지 않다.  

 

 

 

그 가운데!

독보적인 연구성과가 하나 있어 강력추천한다.  

부산대 사학과 곽차섭교수가 쓴 

<조선청년 안토니아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라는 책이다. (푸른역사, 2004) 

 

 

 

 

 

저자는 루벤스 그림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투신하였다.

그 결과 기존의 여러 연구들 가운데 적지 않은 오류들이 있었음을 밝혀내었고,

루벤스의 ‘조선 남자’의 모델은 안토니오 코레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도 규명해 냈다.

 

 

곽차섭 교수에 따르면

루벤스는 이탈리아 유학기간(1600-1608) 동안 두 차례 로마를 방문하였는데

그 기간에 안토니아 코레아를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남자>는 1606년~1608년 사이에 그려졌을 것이다.

 

 

 

 

159 페이지밖에 안되는 짧은 책(그나마 본문은 121쪽 밖에 안됨)에서

숨막히게 전개되는 논리전개를 읽고 있으면

손에 땀이 쥐어지기까지 한다.

미술사의 특이한 소재를 사학자의 시각으로 풀어낸 역작이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덧붙임>

 

곽차섭 교수는 알비마을의 코레아 성씨들이 조선인을 시조로 한다는 건 근거 부족의 무리한 이야기라고주장한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도 현재 코레아라는 성씨가 존재하는데 오히려 그들이 이탈리아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혹은 '쿠리아(Curia)'라는 기존의 성씨가 개명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흥미로운 연구과제가 아직 남아있는 셈이다.  


 

* 2000년 당시 통계를 보면 이탈리아 전역에 살고 있는 '코레아'씨와 ''쿠리아'씨의 분포도가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

  특히 알비마을 인근 지역에서 가장 높은 밀집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두 성씨의 동일기원설을 시사하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곽차섭 책,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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