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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하는곳

셰익스피어 미스터리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1564~1616)

영국이 낳은 대문호, 세계 최고의 극작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단언했던, 대영제국의 국보(國寶).

 

 

 

 

 

 

 

 

그런데

 

 

 

 

 

 

 

 

 

그가 가짜라면?

 

 

 

 

...

 

 

 

 

 

 

오래 전부터 그런 믿지 못할 이야기가 들려온다. 셰익스피어는 가짜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햄릿>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쓴 사람은 셰익스피어가 아닌 딴 사람이라고, 

어쩌면 그는 아예 애초부터 가공의 인물이었는지 모른다고...

 

 

실은 굉장히 유명해 많은 사람들이 들어봤을 그 '소문'을 여기 정리해 올린다.

최근 그와 관련해 나름대로의 답과 큰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미스터리'는 한마디로 '저작성 논쟁(authorship debate)'이다. '4대 비극'과 같은 수많은 걸작을 쓴 사람이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셰익스피어가 맞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이 불거진 이유는 실존했던 셰익스피어는 도저히 그런 작품들을 쓸 수 없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일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때로 가보자.

 

 

 

 

여기는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

런던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이곳에 해마다 40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Stratford-upon-Avon,  '에이븐 강 연안의 스트랫퍼드'라는 뜻. 이후 '스트랫퍼드'로 약칭함

 

 

 

 

 

 

이 집이 바로 셰익스피어 생가

 

 

 

 

 

 

스트랫포드에 있는 '성 삼위일체(Holy Trinity)교회'

셰익스피어가 세례를 받은 곳이고, 죽어서 묻힌 곳이기도 하다. 

 

 

 

 

이 교회의 기록에 의하면 1564년 4월 26일, 이 마을 사는 존 셰익스피어의 아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태어나 세례를 받았고, 18세 되던 1582년, 8살 연상인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다고 한다.

 

 

평범한 중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기초교육 정도만 마쳤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청년은 어느 날 갑자기 런던의 연극계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배우와 극작가로서 활동을 하며 순식간에 유명해진다. 당시 권위있는 작가였던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1558~1592)은 죽기 직전 그를 '벼락출세한 까마귀'라고 비난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정식 대학교육도 받지 못한 신예작가의 성공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그린의 유작 <Groatsworth of Wit> (1592)

이 가운데 그가 셰익스피어를 혹평하는 듯한 대목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록은 셰익스피어의 성공적인 런던 정착을 알려주는 최초의 증거가 되었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이전까지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는 얘기다. 스트랫퍼드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결혼까지 한 뒤 언제, 왜 런던으로 상경하였고 뭘하며 살았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이 청년은 28세가 되던 해 어느날 갑자기 연극계에 짠 하고 나타난 것이다.     

 

그 당시 셰익스피어는 <헨리 6세>, <말괄량이 길들이기>, <리처드 3세> 등의 초기 작품들로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1593년경 페스트가 돌면서 극장들 대부분이 문을 닫게 되었고 셰익스피어는 할 수 없이 희곡이 아닌 '소네트(sonnet, 14행 정형시)'를 써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는데, 이때 발표한 <비너스와 아도니스 Venus and Adonis>(1593)같은 시집은 그의 생존기간 동안 9판까지 찍어낸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609년판 표지 

 

 

 

 

 

 

 

  

유럽의 어느 담벼락에 새겨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30번

소네트가 4-4-4-2 형식을 유지하는 14행 정형시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전염병 사태가 지나가고 1594년, 런던의 극장들은 다시 문을 열면서 전면적으로 개편되었다. 신예 극작가였던 셰익스피어가 본격적인 연극인의 길을 걷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그는 당시의 유력 단체인 '궁내부장관 극단(Lord Chamberlain's Men, 1594-1603)'*에 들어가 이후 은퇴할 때까지 그곳의 전속 극작가로 활동했다.  * 이는 궁내부장관이 이들의 후원자임을 뜻한다. 당시에는 후원자 명칭을 극단에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 이들은 1603년 이후로는 제임스 1세의 허락을 받아 극단명을 ‘킹 극단(King’s Men)’이라 개칭하게 된다.

 

 

그리고 1598년, 셰익스피어의 극단은 자신들의 전용극장인 '글로브 극장(Globe Theatre)'을 건립하였다. 이것은 당시 공공 극장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매주 1만 5천 명의 관객들을 소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는 이 극장의 수익 가운데 10%를 가져가는 주주가 되었고, 가끔은 배우로도 활동하며 황금기를 보냈다. <햄릿>(1600-1601), <오델로>(1603-1604), <리어왕>(1605-1606), <맥베드>(1606) 등의 걸작들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런던에 있는 <Shakespeare's Globe Theatre>

본래의 극장터에 옛모습 그대로, 1997년에 복원해 놓은 건물이다.

주로 박물관의 용도로 이용된다.

 

 

 

 

 

 

극장 내부 풍경

당시 분위기와 공연모습을 알 수 있다.

 

 

 

 

1610년, 당시 46세였던 셰익스피어는 런던의 연극계에서 은퇴해 스트랫퍼드로 돌아온다. 그리고 한창 잘나갈 때 미리 사두었다던, 고향 마을에서 두 번째로 큰 저택에서 여생을 보낸다. 1616년 4월, 52세 나이로 사망했을 때까지 그가 남긴 것은 150 여편의 소네트와 37편의 희곡들 뿐이었다.

 

 

 

 

 

스트랫퍼드 교회 안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무덤

 

 

 

 

이상이 셰익스피어의 일생이다. 생각보다 너무 단출하여 별로 보태고 뺄 것이 없는, 어찌 보면 평범한 삶이다.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는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절대 '인도와도 맞바꿀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인물로 여겨지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인생을 확인할 만한 증거들도 부족하다. 어느 누구도 그가 어떻게 해서 단역배우에서 일류 극작가이자 극단 주주로 신분상승을 하게 되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가 쓴 편지 한 통, 가지고 있던 책 한 권 남아있지 않다.

 

 

그러다보니 '저작성 논쟁'이 불거져 나온 것이다. 스트랫퍼드에서 태어났고 런던에서 연극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가 일생을 마친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사람의 실존은 확실한 듯 하다. 하지만 과연 그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40여 편의 걸작 희곡들을 쓴 사람이 맞는 걸까?

 

 

 

 

 

 

 

 

 

셰익스피어 시대의 연극에는 지금처럼 고상한 객석, 무대, 배우가 전혀 없었다. 당시 연극은 칼싸움이나 곰 놀리기, 닭싸움 등과 같은 저급한 오락거리였다. 극장은 대개 여인숙이나 매음굴 근처에 있어 늘 소란스럽고 악취를 풍겼으며 주변에는 노름꾼, 사기꾼, 양아치들이 우글거렸다. 배우는 그들과 동일시되어 '법적으로도' 부랑자나 범죄자와 같은 계층으로 분류되었다. 관객들은 연극을 보다가 재미없으면 쓰레기나 오물을 던지며 야유했다. 배우가 진지한 독백을 하는 동안 밖에서는 짐승들의 비명이나 구경꾼의 환호가 들려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성공한 연극들은 아마도 자극적인 통속물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어떠한가? 심오한 주제는 차치하고 표현만 놓고 보아도 그들은 전혀 대중적이지 않다. 오히려 학술적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사용된 단어들은 모두 2만개 정도라고 하는데, 이것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킹 제임스 성경>에 사용된 단어들 보다 2배나 많은, 거의 백과사전 수준의 어휘들이라고 한다. 게다가 궁정의 모습과 왕족들의 생활 묘사, 법률과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 표현들은 완벽한 전문성을 띄고 있어, 대학교육이라고는 받아본 적 없는 작가의 솜씨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셰익스피어가 아무리 성공한 사업가이고 귀족과 교류하는 시인이었다 해도, 17-18년 정도 밖에 안되는 작가생활 동안 상류층 생활과 지식들을 그토록 완벽하게 꿰뚫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긴 했지만, 인간의 심오한 삶을 진지하게 통찰하기 보다는 매일매일 객석을 채우는 일에 더 큰 노력을 기울였을 게 확실하다. 그러다보니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들이 실은 다른 사람에 의해 씌어진 것 아니냐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그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프랜시스 베이컨 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우리에겐 '아는 것이 힘이다'로 유명한 근대경험론의 선구자이지만, 실은 셰익스피어와 동시대를 살며 검찰총장, 국회의원, 대법관을 지낸 최고 유력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수상한 미스터리의 인물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그가 처녀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숨겨진 아들이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그가 비밀결사 프리메이슨의 창시자라고도 한다. (그와 관련해서는 지난번 <로스트 심벌> 이야기에서 언급한 바 있다. -> 여기 )  그런데 그가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빌어 연극의 대본들을 썼다는 소문도 있다. 그 속에 등장하는 귀족의 문화와 풍습, 의학, 법률, 종교, 외국 등에 관한 이야기들은 프랜시스 베이컨 정도되는 사람이 아니면 그 시대 그 누구도 쓸 수 없었다는 것이다.

 

 

 

 

'베이컨 설'을 대표하는 책  

미국의 버지니아 펠로스가 쓴 <셰익스피어는 없다> (탄 옮김, 눈과 마음, 2008)

나는 전혀 재미없게 읽었지만... 관심있으신 분들 일독해 보시죠!

 

 

 

 

2. 크리스토퍼 말로우 설

 

크리스토퍼 말로우(Christopher Marlowe, 1564~1593)는 엘리자베스 시대에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유명한 극작가이다. <파우스트박사의 비극적 일생(The Tragical History of Doctor Faustus)>, <몰타의 유대인(The Jew of Malta)>, <파리에서의 대학살(The Massacre at Paris)> 등의 작품을 통해 150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꼽힌다.

 

 

 

 

크리스토퍼 말로우

그는 불과 10년도 되지 않는 활동기간 동안 영국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셰익스피어가 런던에 등장하기 직전 가장 성공한 극작가로서, 셰익스피어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여겨진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아예 그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직접 썼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593년 5월 30일, 말로는 의문의 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술집에서 일어난 칼싸움으로 눈을 찔려 숨을 거둔 것이다. 그런데 동료 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당시에 극심한 허무주의와 무신론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신성모독의 글을 쓴 혐의로 체포영장까지 발부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하필 그 순간에 사소한 술값 다툼으로 칼부림이 일어나 돌연사로 이어지다니... 황당한 상황과 우연의 일치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선 크리스토퍼 말로가 사형(당시에는 이단혐의가 확인되면 사형에 처해졌다)을 피하기 위해 사고사로 죽음을 위장하고 자신은 이름을 바꿔 비밀스런 글쓰기를 계속했다는 소문이 생겨났다. 그것이 바로 셰익스피어라는 것이다. 

 

 

 

 

3. 옥스퍼드 백작 설 

 

'옥스퍼드 백작(Earl of Oxford)'은 12세기 초부터 옥스퍼드 지방을 다스려온 귀족가문의 수장이다. 그 중 17번째 백작인 에드워드 드 비어(Edward de Vere, 1550~1604)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심복이자 시인, 극작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특히 여러 극단의 후원자가 되어 공연을 지원할 만큼 연극에 열정을 보였는데, 그가 바로 셰익스피어라는 가명으로 활동한 진짜 주인공이라는 주장이다.

 

 

 

에드워드 드 비어 옥스퍼드 백작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오손 웰즈도, 그가 바로 진짜 셰익스피어라고 믿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옥스퍼드 백작은 본래부터 연극에 관심이 많아 희곡 작품들을 계속 써왔는데, 귀족인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발표할 수가 없어 가명을 쓰게 됐다고 한다. 다시 말해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은 그의 필명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근거로, 옥스퍼드 가문의 '문장'을 든다.

 

 

옥스퍼드 가문의 문장

사자가 부러진 창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다.

Shake(흔들다) + Spear(창) = Shakespear(셰익스피어)가 됐다고 한다.

 

 

 

옥스퍼드 백작이 셰익스피어의 정체라고 주장하는 이론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하였는데, 의외로 큰 호응을 얻어 현재까지 가장 유력한 '진짜 후보(?)'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 심지어 진지한 학술적 연구를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영국의 '드 비어 학회(De Vere Society)'나 미국의 '셰익스피어 옥스퍼드 학회(Shakespeare Oxford Society)' 는 공공 연구와 세미나 등을 통해 '에드워드 드 비어가 진짜 셰익스피어다'라는 가설을 체계적으로 입증하려 하고 있다.  

 

드비어 학회   http://www.deveresociety.co.uk

셰익스피어 옥스퍼드 학회   http://www.shakespeare-oxford.com

 

 

 

 

이상 '맛뵈기' 차원에서 가장 유명한 세 사람의 사례를 들었는데, 실은 이와 같이 '진짜 셰익스피어'라고 거론되는 후보자(?)들은 30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 중에는 심지어 엘리자베스 여왕도 있다. - -;;)

 

 

 

 

 

 

이쯤에서 나의 생각을 말하자면... 

 

 

나는 본래 이러한 논쟁이 너무나도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기록이 부족하다 해도 실존 인물이 존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어떻게 '그럴 듯한 정황들'만 가지고 정체를 의심할 수 있느냐는 반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전 놀라운 소식을 접하고 그 생각이 바뀌었다.

 

    

 

'셰익스피어 저작성 연합(Shakespeare Authorship Coalition, 이하 SAC)'의 홈페이지

 

 

 

미국 캘리포니아에 SAC라는 단체가 있다고 한다. 이들이 2007년 4월 23일, 세익스피어의 391번째 기일(忌日)을 기념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정체에 관한 합리적 의심 선언문(Declaration of Reasonable Do

ubt About the Identity of William Shakespeare)>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속에는 132명의 학계, 문화계 인사들의 '우리는 셰익스피어가 가짜라고 의심한다'는 서명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셰익스피어의 정체에 대해 정통 학계는 해결된 문제로 간주하거나 금기시하고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어왔다'고 밝히며 '이 문제가 학계 연구, 출판과 강의의 정식 주제로 다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9년 뒤 셰익스피어 사망 400주기인 2016년 4월 23일까지 캠페인을 계속 벌여 온라인 서명자를 모으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 관심있으신 분들은 홈페이지 가보시길...

매일매일 서명자들이 늘어나고 있음 ㅋㅋ

 

http://doubtaboutwill.org

 

 

 

 

 

셰익스피어 글로벌 시어터의 전 예술감독인 마크 라이런스(Mark Rylance, 左)

영국 최고의 연극배우인 데릭 쟈콥비(Derek Jacobi, 右)가 들고 있는 선언문

셰익스피어의 적자(子)들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2007년 9월 초 가담하면서

'합리적 회의' 논쟁은 전세계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SAC가 밝힌,

 

일찍부터 셰익스피어의 정체를 의심했던 '선각자들'

 

 

 

 

 

랠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의 사상가, 시인. 대표작 <자연론>

 

 

 

 

 

 

월트 휘트먼 (Walt Whitman, 1819~1892)

미국의 시인. 대표작 <풀잎>

 

 

 

 

 

 

 

마크 트웨인 (Mark Twain, 1835~1910)

미국의 소설가. 대표작 <톰 소여의 모험>, <왕자와 거지>

 

 

 

 

 

 

 

헨리 & 윌리엄 제임스 (Henry and William James)

미국의 소설가인 헨리 제임스(左)와 심리학자, 철학자인 그의 형 윌리엄 제임스(右)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의 신경과 의사, 정신분석의 창시자. 대표작 <꿈의 해석>

 

 

 

 

 

 

 

 

존 골즈워디 (John Galsworthy, 1867~1933) 

영국의 소설가, 극작가. 노벨문학상 수상(1932)

 

 

 

 

 

 

 

 

오손 웰즈 (Orson Welles, 1915~1985)

미국의 영화감독. 대표작 <시민케인>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추종자로도 유명

 

 

 

 

그리고

 

 

 

 

찰리 채플린 (Charlie Chaplin, 1889~1977)

 

 

 

 

 

 

 

셰익스피어의 미스터리는 이제 단순한 가십이나 음모론적 망상을 넘어 학계의 진지한 연구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미 400년 전에 죽은 사람의 정체에 대해,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논쟁이 심각해지는 현상을 보며 나의 궁금증들도 점점 커져갔다. 그러다가 그것들을 한 방에 해결해 줄 책을 발견하였다.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가 아니다>라는 책이다.

 

 

 

 

  

잭 린치,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가 아니다> (송정은 옮김, 추수밭, 2009)

 

 

 

미국 러트거스(Rutgers)대학교의 영문학 교수인 잭 린치(Jack Lynch)가 쓴 책으로 원제는 <Becoming Shakespeare>(2007), 우리말 부제는 '문화영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이다. 원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셰익스피어가 어떠한 '과정들'을 통해서 점차 '만들어졌다'는 어감을 내포하고 있으며, 부제는 사람들의 문화사회적 욕망 때문에 재해석되고 조작된 '문화영웅'이 탄생한다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나는 이 책 속에서

그 동안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과 

알고는 있었지만 미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요소들을 깨닫게 되었다.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내가 내린 최종 결론들을 지껄여 보겠다.

 

 

 

 

 

 

 

 

  

먼저 그의 죽음부터 생각해 보자. 셰익스피어의 장례식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그래서 그의 '가공인물설'까지 등장한 것이다.) 역시 교회 기록상으로 1616년 4월 23일 셰익스피어가 사망했고 그로부터 이틀 뒤에 묻혔을 뿐이다. 그가 살았던 엘리자베스~제임스 시대는 기록 보관에 매우 철저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편지와 일기들을 열람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문서 어디에도 셰익스피어의 죽음이나 그의 장례식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어떻게 사망했는지, 장례식에 누가 참석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단 하나, 셰익스피어가 사망했을 당시에는 그가 그토록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공한 인생을 살긴 했지만, 죽었을 때의 소식이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알려져야 할 필요는 없었던 사람이었다.

 

 

 

(결론 1) 

 

셰익스피어는

살아생전 대박 작가이긴 했지만

국가적 영웅은 아니었다.

 

 

 

 

 

 

 

셰익스피어의 <첫번째 2절판> (1623)

흔히 유럽에서는 '구텐베르크 성서 다음으로 유명한 책'이라 불린다.

 

 

 

1623년, 셰익스피어가 죽고 7년 뒤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가 속했던 극단의 후배들인 헤밍스(John Heminges, 1566~1630)와 컨들(henry Condell, 1576~1627)이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을 모아 책으로 출판을 한 것이다. 2절지 크기의 거대한 호화판으로 나온 이 책은 보통 <첫번째 2절판(First Folio, 이하 줄여서 F1)>이라고 하는데,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는 아니었지만 이후 셰익스피어 신화의 기초를 마련한 획기적인 자료가 되었다. 셰익스피어는 (당시 모든 극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작품이 출간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희곡은 공연을 통해 보여져야지 글로 읽는 게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F1>의 등장으로 이제 그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 후대의 새로운 관객들도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즐길 수 있게 되었고, 학자들은 그의 작품에 주석을 달며 연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론 2) 

 

셰익스피어의 희곡집 출판이 없었다면

아마 그는 곧 잊혀졌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초판본에 얽힌 비밀과 음모를 다룬 소설 <퍼스트 폴리오>

(제니퍼 리 카렐 지음, 시공사, 2008)

나도 아직 안 읽어봤지만 다른 분들 참고하시라고...

 


 

셰익스피어 사후에 작품집이 출간되긴 했지만 그 중요성이 밝혀진 건 한참 뒤의 일이고, 실은 별 게 없었다. 그의 희곡들이 드문드문 상연되고는 있었지만 당시 떠오르는 젊은 극작가들의 작품에 비해서는 인기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잭 린치는 이렇게 말한다.

 

 

1630년대에 이르러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은 구식으로 치부되었고,

나이든 사람들이 옛날을 추억할 때 떠오르는 것 정도에 불과했다.

...

 오늘날 젊은이들이

40년이 지난 옛날 음악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접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1635년의 젊은이들도 1595년에 쓰인 연극들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가 아니다>, p.25

      

 

 

심지어 1642년~1660년까지는 영국 내에서 아예 연극을 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때는 '청교도 혁명' 시기였는데, 정권을 잡은 청교도들이 연극을 타락한 '악(惡)'의 표현으로 여겨 강제적으로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왕정복고'로 다시 옛날 정권이 돌아오면서 공연이 재개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셰익스피어가 다시 각광받기 시작한다.

 

    

(청교도 혁명이 끝난 후)

새로 세운 극단들이 처한 가장 절박한 문제는 공연을 할 만한 새로운 희곡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 동안 무대 위에 올릴 희곡은 단 한 편도 쓰이지 않았다.

곧바로 새로운 희곡집필에 착수했지만 시간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극단의 단장들은 지금 당장 돈을 벌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옛날 상연 목록을 되돌리는 것이었다.

 

...

 

"연극이 금지되었던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싶어 했나?

셰익스피어가 그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고상하고 신선한 다양한 오락거리들 아닌가?"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가 아니다>, p.48

      

 

 

이렇게 연극계가 부흥기를 맞을 때, 셰익스피어는 앵콜 스타가 되었다. 극장은 커지고 무대는 호화스러워지고, 천박한 광대 취급을 받던 배우들은 스타덤에 올라 돈과 명예를 누리게 되었을 때, 그 중심에 셰익스피어가 있었던 것이다.    

 

 

 

 

(결론 3) 

 

셰익스피어는

우여곡절의 시대가 지나고

1660년대가 돼서야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존 드라이든 (John Dryden, 1631~1700)

영국의 시인, 극작가 겸 비평가.

왕정복고기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영국 비평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대표작 <극시론> (1668)

 

 

 

 

1668년, 드라이든이 저 유명한 <극시론>을 발표하면서 셰익스피어는 '학술적으로' 급부상한다. 당시 가장 뛰어난 비평가였던 드라이든이 고전과 당대문학, 외국과 영국문학을 비교하면서 셰익스피어를 '모든 현대 시인과 어쩌면 고대 시인들까지 포함해 가장 크고 넓은 영혼을 지닌 사람'으로 극찬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담하게 '나는 셰익스피어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이전까지 일개 희곡 집필가에 불과했던 셰익스피어를 위대한 천재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데뷔 후 76년 만에 셰익스피어는 드디어 영국 최고의 작가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50년 뒤, 셰익스피어는 당대 최고의 유명인사에 의해 다시 한번 숭배되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알렉산더 포프였다.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1688~1744)

영국 고전주의의 대표적 시인

대표작 <우인열전>

 

 

어른이 되어서도 140cm 밖에 안되는 곱사등이 기형아였던 포프는 30대 나이인 1720년대에 이미 영국 최고의 문학가로 인정받는 유명인이었다. 당시 그는 한 출판업자의 의뢰를 받고 셰익스피어 희곡 작품집의 개정판을 출간하였는데, 그 서문에서 "셰익스피어는 비평가들로부터 모든 영국 시인들 가운데 가장 완벽하고 뛰어난 시인이라는 고백을 들어야 마땅하다"라고 주장했다. 18세기에 이르러 셰익스피어는 명실상부한 전설이 된 것이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포프는 개정판을 내기 위해 그때까지 6~7가지 버전으로 출간된 셰익스피어의 작품집들을 나름대로 '편집'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 전까지는 뜻만 통하면 상관없었던 여러 종류의 대사들이, 완벽한 하나의 모습으로 '보강' 내지는 '통일'되었다. 예를 들면 <햄릿> 3막 1장에 나오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다음과 같은 대사를 보자.

 

 

 

사느냐, 아니면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죽은 듯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맞서 싸워야 하는가

죽는 것은 잠드는 것, 그것뿐이다.

잠이 들면 모든 것이 끝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Whether 'tis nobler in the mind to suffer

The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

Or to take arms against a sea of troubles,

And by opposing end them? To die: to sleep;

No more; and by a sleep to say we end

 

 

 

 

지금은 마치 성경의 한 구절 처럼 완벽한 '경구'로 존재하고 있는 명대사지만, 본래는 옛날 판본들 속에서 여러가지 버전으로 존재해 온 말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판소리 가사가 판본들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 처럼...) 그 가운데에는 심지어 다음과 같이 형편없는 버전도 있었다고 한다.

 

 

 

사느냐, 아니면 죽느냐, 그것이 핵심이다.

죽느냐, 잠자느냐, 그것 뿐 아닌가?

 

To be, or not to be, I there's the point

To die, to sleep, is that all? I all:

  

    

 

 

대사의 분량, 말투, 의미 등등 모든게 천차만별이다. 이것은 연극 특성상, 원대본을 놓고 배우들이 그때그때 자기 입맛에 맞게 외웠다가, 나중에 그 기억을 토대로 여러 버전으로 '채록'을 했기 때문에 생겨난 차이이다. 어느게 오리지널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저 황당한 두 줄짜리 '대사'가 셰익스피어의 원본이고, 지금은 유명해진 여섯 줄짜리 '경구'는 훗날 살이 점점 붙어 장황해진 버전인지 모른다.

 

 

알렉산더 포프는 '완벽하지 않은 것은 절대 셰익스피어의 것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초창기 판에서 부족하거나 지저분한 구절들이 발견되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배우, 인쇄업자,검열가 등)의 무식함에서 비롯됐다고 믿고, 가장 완벽한 형태로 교체했다고 한다. 이제 셰익스피어는 단순히 위대한 작가가 아니라 그 어떤 실수도 저지를 수 없는 신성한 존재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론 4) 

 

셰익스피어는

18세기부터 '전설'이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원작에 대한 많은 윤색과정이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우리는 이제 그 이후의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1800년 무렵 ‘반신(半神)’의 지위에까지 올라 '영국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작품들은 수많은 정치가, 극작가, 편집자, 학자, 비평가, 교사들의 ‘손’을 계속 거쳐왔다. 당시 정치적인 이유로, 때로는 교육 목적상 여러 사람들이 ‘손’을 대 조금씩 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지금 보는 모습처럼, 대학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한 사람의 작가가 썼다고는 믿을 수 없는, 완벽한 작품들이 탄생한 것이다.

 

 

 

 

결국 

 

셰익스피어를 만든 건

 

 

 

 

수많은 사람들과

 

 

 

긴 역사였다.

 

 

 

 

 

 

 

중학교 2학년 소풍날,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땡땡이'를 치고

광화문 국제극장에 가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매일 밤 올리비아 핫세를 떠올리며 셰익스피어를 탐독했다.

생각해보니 대학교 때 연극반 활동을 한 것도, 그때 만난 셰익스피어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시간이 한참 흘러 이제는 오델로가 아프리카인이었다는 내용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를 지은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무력으로 집권한 군인대통령이 아무리 잡스러운 의도로 충무공을 성웅으로 만들었다 해도

그가 우리의 위인인 것은 틀림없듯이

셰익스피어가 아무리 긴 세월의 조작으로 만들어진 문화영웅이라해도

나의 최고의 교사인 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누구든,

그들이 있든 없든...

 

 

 

 

 

 

 

 

 

 

 

친구여, 부디 여기 담긴 흙먼지를 파내지 마시게

 

이 묘석 돌들을 그냥 두는 자는 복을 받고

 

내 뼈를 움직이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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