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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하는곳

거꾸로 보는 세상

회문시란

머리에서부터 내리읽으나 아래에서부터 올려 읽으나

뜻이 통하고 운(韻)이 맞는 한시(漢詩)를 말한다.

 

예를 들면 이인로는 이런 시를 썼다.

 

 

 

                        早學九遊宦 일찍이 학문하여 벼슬을 구했으나

                        詩成謾苦辛 시짓기는 부질없이 힘만 드누나

                        老懷春絮亂 늙은 속마음은 봄 버들가지처럼 어지럽고

                        衰鬢曉霜新 드문 머리카락은 새벽에 서리가 앉는구나 

                        倒甑朝炊斷 가마솥 엎어지니 아침밥 못 짓겟고

                        饑腸夜孔藩 주린 창자는 밤에도 소리 나네

                        報恩心欸欸 성은을 갚으려는 마음 간절하지만

                        誰是救枯鱗 말라가는 물고기를 구할 사람 그 누군가

 

                                                                                                          - <파한집> 상권 16조

 

 

 

가난한 선비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늙어가는 속마음을 노래한 시다.

(한때 이인로 자신의 처지이기도 하다.)

'5언 율시'로서 2, 4, 6, 8행의 각운을 맞추어야 하는데

辛(신), 新(신), 藩(번), 鱗(린)에 잘 맞추어 놓았다.

 

 

 

그런데 이 시를 거꾸로 읽어도 멋진 시가 된다.

 

 

 

                        鱗枯救是誰 물고기 말라가니 구할 이 누군가

                        欸欸心恩報 깊이깊이 감사하며 은혜를 갚을텐데

                        藩孔夜腸饑 울타리 구멍난 밤 배는 고프고

                        斷炊朝甑倒 밥짓기 끝난 아침 가마솥을 기울이네

                        新霜曉鬢衰 새 서리 내린 새벽 머리카락 빠지고 

                        亂絮春懷老 버들가지 어지러운 봄 속마음은 늙어가네  

                        辛苦謾成詩 쓰디쓴 마음에 부질없이 시를 짓는데 

                        宦遊九學早 벼슬아치들은 놀면서도 일찍 학문을 이루었구나  

 

 

 

 

거꾸로 읽어도 뜻이 통하는 건 물론, 역시 2, 4, 6, 8행에

報(보), 倒(도), 老(로), 早(조)의 각운을 절묘하게 배치했다!!

 

 

 

 

 

 

 

 

 

재밌다!

 

 

 

 

 

 

이런 개념을 가진 용어가 따로 있을까... 찾아보았더니

'팰린드롬(palindrome)'이라는 말이 있었다.

우리말로 '회문'이라 번역되긴 하지만, 아까 본 '회문시'와는 약간 다른 개념으로,

영어 가운데 '바로 보나 거꾸로 보나 같은 말'을 뜻한다.

 

 

예를 들면 이런 단어들...

civicradarlevelrotatorkayakreviver...

 

 

 

그리고 이런 문장들...

Madam, I 'm adam

Dammit, I'm mad!

Was it a rat I saw?

Step on no pets

Sit on a potato pan, Otis

Satan, oscillate my metallic sonatas

I roamed under it as a tired nude Maori

Rise to vote sir

 

 

 

이름에도 팰린드롬이 있다!

LA에 사는 재미교포 Mike Kim씨는 거꾸로 해도 Mike Kim씨다...

(우리나라엔 이효리~ ㅋㅋ)

 

 

 

 

 

 

우리말에도

'팰린드롬'이 있을까?

 

 

 

 

 

여기에 대해선 남기현 어린이가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그에게 물어보니 어디서 모아온 문장들을 주르륵 긁어 빌려준다...   

 

 

 

 

다 가져가다

건조한 조건

기특한 특기

다시 합시다

다들 잠들다

통술집 술통

아 좋다 좋아

다시 합창 합시다

소주 만병만 주소

자꾸만 꿈만 꾸자

다 이심전심이다

다 같은 금은 같다

색갈은 짙은 갈색

여보 안경 안보여

다 같은 것은 같다

다 좋은 것은 좋다

생선 사가는 가사선생

홀아비집 옆집 비아홀

바로 크는 크로바

다 이뿐이뿐이다

자 빨리 빨리 빨자

짐 사이에 이사짐

나가다 오나 나오다 가나

다리 그리고 저고리 그리다

소 있고 지게지고 있소

다시 올 이월이 윤이월이올시다

다 큰 도라지일지라도 큰다

대한 총기공사 공기총 한 대

아들 딸이 다 컸다 이 딸들아

지방상인 정부미 부정인상 방지

가련하다 사장집 아들딸들아 집장사 다 하련가

 

 

 

 

 

 

나는 아무래도

바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변화가 없는 '팰린드롬'보다는

바로 읽을 때와 거꾸로 읽을 때 느낌이 달라지는 '회문시'가 더 맘에 든다.

 

 

이 기회에 '거꾸로 보는 그림'들을 모아보기로 했다.

글 가운데 '회문'이 있으니 이것들은 '회화(回畵)'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다.

 

 

 

 

먼저 저 유명한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의 그림부터 보자.

16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루돌프 2세의 궁정화가로 활동했던 독특한 화가이다.

꽃과 과일, 채소 등을 늘어놓고 사람얼굴을 그린 작품들로 유명한데...

 

 

 

이런 걸작 '회화(回畵)'들도 있다! 

 

 

 

각종 야채를 담아놓은 그릇

 

 

 

 

 

 

 

 

거꾸로 보면... 

 

 

 

 

 

 

사람얼굴!

 

 

 

 

 

 

 

 

 

 

 

 

 

 

<새끼돼지 통구이 요리>의 뚜껑을 여는 손

 

 

 

 

 

 

 

 

거꾸로 보면...

 

 

 

 

 

 

역시 사람얼굴!

 

 

 

 

 

 

 

 

 

 

 

 

과일바구니~

 

 

 

 

 

 

 

 

거꾸로 보면...

 

 

 

 

 

이번에도 사람얼굴!!

 

 

 

 

 

 

 

아르침볼도의 이런 작품들은 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여러 사람들이 '거꾸로 보면 달라지는 그림'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렉스 휘슬러(Rex Whistler,1905~1944)라는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일 것이다.

 

 

 

 

그의 작품들을 좀 구경해 볼까?

 

 

 

 

미소짓는 여왕

 

 

 

 

 

 

거꾸로 보면...

 

 

 

 

 

 

근엄하신 황제폐하

 

 

 

 

 

 

 

 

 

한눈 찡그린 심술보

 

 

 

 

 

 

거꾸로 보면...

 

 

 

 

 

윙크하는 익살꾼

 

 

 

 

 

 

 

 

 

 

 

철모쓴 할아버지 군인

 

 

 

 

 

 

거꾸로 보면....

 

 

 

 

 

 

 

 

오~호~!!!

 

 

 

 

 

 

 

 

 

 

 

모자벗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거꾸로 보면....

 

 

 

 

 

 

멀끔한 중년 아저씨

 

 

 

 

 

 

 

 

 

 

 

아래를 내려다보며 짓는 미소

 

 

 

 

 

 

거꾸로 보면....

 

 

 

 

 

 

위로 올려다보며 째려보는 모습

 

 

 

 

 

 

 

 

 

 

 

 

이건 생각에 잠긴 아저씨 같은데...

 

 

 

 

 

 

거꾸로 보면....

 

 

 

 

 

할머니가 되었어요!!

 

 

 

 

 

 

 

 

세상엔 천재들이 참 많다.

 

구스타프 버빅(Gustave Verbeek, 1867~1937)이라는 사람을 소개한다.

미국에서 활동했던 네덜란드계 만화가로, 1900년대 초 <New York Herald>라는 신문에 연재한

'거꾸로 보는 만화'로 대박을 냈던 주인공이다.

 

 

 

 

 

 

 

 <The Upside Downs of Little Lady Lovekins and Old Man Muffaroo> 라는 제목인데

6칸짜리 만화를 다 읽은 뒤, 뒤집어서 보면 다시 6칸짜리 이야기가 계속되는... 그런 포맷이었다.  

 

 

 

 

 

즉, 이걸 다 읽고

 

 

 

 

거꾸로 보면...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6칸 만화를 두 배로 즐기는 놀라운 기획이다.

 

여러분도 한번 즐겨보시기 바란다.

 

 

 

 

 

 

 

거꾸로 보면...

 

 

 

 

 

 

 

 

 

 

 

 

그러고 보니 이쯤에서 '앰비그램(Ambigram)'이 생각난다.

바로 보나 거꾸로 보나 똑같은, 특이한 디자인의 그림문자....

 

 

 

 

 

기억나시죠?

<천사와 악마>의 책과 영화에 나온 '일루미나티(Illuminati)'의 앰비그램 

 

 

 

 

이런 앰비그램을 주로 만드는 유명작가 가운데

스코트 김(Scott Kim, 1955~)이라는 미국 디자이너(한국계가 아닐까 추측...)가 있다.

그의 수많은 글씨 도안 가운데에는

깊은 성찰을 담은 뛰어난 작품들도 많다. 

 

 

예를 들면 이런 거...  

 

 

 

 

'가르치다(teach)'라는 말을 거울 위에 놓고 보니 '배우다(learn)'라는 말이 비쳐진다!

'가르침'과 '배움'은 그림자 같은 것... 이 얼마나 철학적인가? ㅋ 

 

 

 

 

http://www.scottkim.com

 

이런 그림글씨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스코트 김의 웹페이지를 방문해 보시길...

 

 

 

 

 

 

 

 

 

갑자기

 

'거꾸로 보는 그림'과 함께

'물에 비추어진 그림'이란 테마가 떠올랐다.

 

 

 

 

그건 정말 흥미진진한 세계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의 이미지...

 

 

 

 

위 사진은 내가 직접 찍은 거다.

(2004. 8. 미국 시라큐스)

제대로 된 '반영사진'이라 할 수 없어 부끄럽다.

 

 

 

그래서, 해외 사이트에서 적당한 작품들을 몇 개 퍼왔다. 

 

 

 

 

 

이 사진... 멋지죠?

 

 

 

 

 

 

거꾸로 보면 원본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물 위에 뜬 연꽃 그림자를 찍은 뒤 거꾸로 돌렸다.

마치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보는 듯 하다.

 

 

 

 

 

 

 

 

'반영사진'의 진수는 역시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리라...

(어떻게 찍었는지는.. 아시겠죠? ^^)

 

 

 

 

 

 

 

 

 

 

이제 마지막으로

 

'거꾸로 보는 그림'의 놀라운 미스터리를 전할 차례이다.

 

 

 

 

 

 

아래 사진을 보자.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들이다.

한눈에 보아도, 움푹, 오목하게, 패여 있다.

 

 

 

 

 

 

 

 

 

 

 

그러나...

 

 

 

 

 

 

 

 

 

이것을 거꾸로 돌려보면...

 

 

 

 

 

 

 

 

어때요? 볼록 튀어나와 보이지 않나요?

 

 

 

 

 

 

 

 

 

 

 

 

햇빛의 그림자와 그 방향에 관한 선입관 때문에 일어난 착시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절대 이해가 되지 않는 설명이다.

 

 

 

 

 

 

 

 

 

 

 

 

 

거꾸로 보면 분명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우리나라 지도도 거꾸로 놓고 보면

중국과 러시아에 꽉 막힌 반도국가가 아니라

저 멀리 태평양을 향해 뻗어나갈 세계의 중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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