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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하는곳

미켈란젤로 수수께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천재 미술가
한국에서 초등학교 2학년만 되어도 알게 되는 유명한 이름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는

 

 

 

 

 

 

 

 

미스터리의 인물

 

 

 

 

 

 

그와, 그의 작품을 둘러싼 흥미진진한 소문과 뒷얘기는 수두룩하다.

 

여기 몇 가지만 소개해 본다.

 

 

 

 

 

 

 

 

 

 

 

 

 

 

일단,

이러한 소문이 있다.

 

 

 

<피에타(Pieta)>에는 미켈란젤로의 또렷한 서명이 들어가 있는데

이것은 그가 목숨을 걸고 행한 짓(?)이었다는 것...

  

 

 

 

 

미켈란젤로가 24세때(1499년)에 만들어낸 걸작, <피에타>  

 '피에타'란 라틴어로 '연민(pity)의 의미인데,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그가 로마에 머물던 시절 프랑스인 추기경의 주문으로 제작하였고

현재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 입구에 전시돼 있다.

 

 

 

 

 

 이 작품 어디에 서명이 있다는 걸까?

 

 

 

바로 여기~

성모 마리아가 두른 어깨띠에...

 

 

 MICHEL-AGELVS-BONAROTVS-FLORENT-FACIEBAT

 피렌체 출신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듦

 

 

 

 

그렇구나...

 

하지만 뭐...

 

작품 속에 작가 이름을 넣은 게 신기한 일도 아니고...

 

목숨을 걸었다는 건 또 뭐야?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르네상스 시대 회화나 조각 가운데에 아티스트의 서명이 들어간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품의 의뢰인이 이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의뢰인이라 함은 대개 귀족이나 교회에 속한 권력자들이었는데, 이들은 비싼 작품값을 주고서 예술가를 고용하고는, 그 작품에는 서명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한창이었던 1500년대에는

위대한 화가들조차도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는 장인 정도로 여겨졌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급료는 많이 받았지만 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같으면 매우 천한 직업으로 보일 것이다."

 

페데리코 체리, <티치아노-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 중에서

 

 

 

그대신 의뢰인들은 자기 얼굴이나 가문의 상징을 작품 속에 넣어달라고 주문했다. 화가들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주면서 그 사이에 슬쩍슬쩍 자신들의 얼굴도 그려넣었다고 한다.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가 그린 <동방박사들의 경배>라는 작품을 보자.

 

 

보티첼리, <동방박사들의 경배> (1477)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 일행을 그린 그림 

 

이 작품에는 아마도 당시 피렌체를 지배하고 있던 '메디치' 가문에서 돈을 댄 것 같다. 동방박사가 전부 그 집안 사람들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기예수에게 경배를 올리는 흰 머리 할아버지는 당시 메디치 가문의 원로인 코시모 메디치이고, 중앙의 붉은 망토는 코시모의 큰 아들 피에로, 그 왼편의 흰 옷은 둘째 아들 조반니라고 한다.

 

 

 

중요한 건 이 그림에도

화가의 '싸인'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 대신... 

 

 

 

그림의 맨 오른쪽에 서서 관객을 바라보는 이 사람!

 

 

  

그가 바로 이 그림을 그린 보티첼리라고 한다.

 

 

 

 

<자화상>으로 확인해보자... 

똑같은 얼굴이다. ('메디치 메달'을 들고 있음 ^^)

 

 

 

 

 

기왕 시작한 거 하나만 더 보자. 이번에는 훨씬 더 유명한 작품이다.

미켈란젤로의 라이벌,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가 그린 <아테네 학당>이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10)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디오게네스 등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과학자, 사상가들이 총출동한 유명한 작품  

 

 

여기서 오른쪽 아래에 몸을 구부리고 컴퍼스로 뭔가를 그리고 있는 사람은 유명한 수학자 유클리드이다. 그런데 그의 황금빛 옷깃 뒤를 자세히 보면 'R.U.S.M'이라는 네 글자가 써있다.

 

 

 

 

솔직히... 여기 올린 그림파일은 화질이 후져서 잘 안보인다. 나중에 잘 보이는 그림으로 교체하겠다. - - ;;   

 

 

 

'R.U.S.M'는 'Raphael Urbinas Sua Manu', 즉 '우르비노 출신 라파엘로가 직접 그렸다'는 뜻이다. 라파엘로가 이런 식으로 몰래 서명을 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성이 안 찼는지, 그는 결국 '까메오 출연'을 해버리고 말았다. 유클리드 뒤에서 관객을 보고 있는 한 젊은이로...

 

 

 

 

 

 

 

 

 

<자화상> 확인~

역시 같은 얼굴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는 주로 이런 식으로 자신을 알렸던 것이다.

 

 

하지만 <피에타>는 그와 달리, 조각가의 이름을 당당히 새기고 있으니...

 

 

  

 

미켈란젤로는 대체 무슨 배짱이었을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피에타>가 공개되는 날 미켈란젤로는 성베드로 성당의 기둥 뒤에 숨어서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박수갈채를 보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보니 반응이 뜨겁기는 한데, 대부분 '로마나 롬바르디아 출신의 어떤 천재가 만든 작품이 아닐까?' 하며 오해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미켈란젤로는 무명이었으니까) 이러한 반응에 화가 난  미켈란젤로는 그날 밤 몰래 성당에 침입해 결국 문제의 서명을 남겼다고 한다. 만약 스위스 근위병들에게 들켰다면 현장에서 목이 달아날 뻔한 일이었다.

 

어떤 과학자는 <피에타> 표면을 레이저로 정밀검사한 결과 서명된 글자들이 유난히 불규칙한 솜씨였다고 하며, 이는 떨리는 손으로 재빠르게 파내려갔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어떤 학자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us)'라고 써야할 때 '미켈라즐로(Michelaglus)'라 하고, '만들었다(fecit)'라고 써야할 때 '만들고 있었다(faciebat)'라고 하는 등 어이없는 오타가 발생했음을 지적하며, 이것이야말로 극도로 초조해 하던 당시 상황을 나타내는 게 아니겠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왜?

 

 

 

만약 저 서명이 없었다면 원래의 작품은

 

마리아가 그냥 '민(blank)띠'를 두르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

 

 

 

과문한 탓이지만, 나는 아직 성모 마리아가 '띠' 있는 옷을 입고 등장한 회화나 조각작품을 본 적이 없다.그리하여 나는, 감히, 이러한 가설을 세운다.

 

 

포부를 안고 상경한 20대 초반의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제작을 의뢰받고, 혈기왕성한 탓에 그만 '오버'해서 작품 가운데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로 한다. 하지만 막상 이를 실행하려니 겁이 나서 일부러 이름을 약간 틀리게 적은 게 아닐까?... ㅋㅋ... 

 

 

 

어쨌든 미켈란젤로가 89살까지 장수하면서 평생 제작한 수많은 작품 가운데 이름이 들어간 것은 이것 뿐이다. 정확한 사연은 모르되, 나는 그가 젊은 날의 만용을 후회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믿는다.

 

 

<피에타>로 명성을 얻은 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이번에는 피렌체 시청으로부터 <다비드> 상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3년 간의 제작 끝에 제2의 히트작을 만들어 내게 된다.

 

 

 

 

  29세의 미켈란젤로가 하나의 대리석을 깎아 만든 걸작 <다비드> (1504)

골리앗과의싸움 직전에 돌을 쥐고 막 던지려는 긴장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몸의 비례가... 

 

좀 이상하지 않는가?

 

 

 

 

 

 

나는 옛날, 이원복 선생의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이라는 만화책에서 이 사진을 처음 보고, 이 사람 머리가 참 크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 손은 더 큰 것이었다.

 

 

 

천재라는 사람이 왜,

머리와 손을 저렇게

바보처럼 크게 만들었을까?

 

 

 

알고보니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본래 이것은 높은 벽 위에 설치하기로 하고 의뢰된 작품이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이 완성되면 사람들이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볼 수 밖에 없다는 것에 착안, 아래에서 볼 때 강한 힘을 느낄 수 있도록 일부러 손과 발과 머리를 특대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멀리서도 눈이 잘 보일 수 있도록 눈동자도 깊게 드릴로 팠고, 그 간격도 일부러 넓게 벌렸다. 그 결과 <다비드>는 눈도 이상해졌다. 

 

 

 

여러분은 혹시 알고 있었나요? 다비드의 눈동자는 '하트모양'이라는 사실~

이것도 역시, 멀리서 눈동자가 또렷하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겠죠? 

 

 

그런데 최고의 반전이 있다. 이 작품이 공개된 후 피렌체 시에서 계획을 바꾼 것이다. 작품이 대단히 훌륭해 높은 곳에 올려놓고 보기에는 너무 아까우니,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시청입구로 옮기자는 배려였다. 그 결과 <다비드>는 아래로 내려왔고, 작가의 기획의도는 완전히 망쳐져 버렸다. ㅋㅋ

 

 

 

 

  

 

미켈란젤로의 젊은 시절 에피소드들을 에피타이저로 삼아봤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미켈란 코드>를 이야기 할 차례다.

그것은 바로 '시스티나 예배당'과 관련된 것이다.

 

 

 

 

 

 시스티나 예배당 (Cappella Sistina, 영어로는 Sistine Chapel)

바티칸 내에 있는 교황 전용의 작은 예배당.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해 볼까?

광장 뒤편, 성베드로 성당의 '오른쪽 작은 돔' 바로 옆에 있는 '네모난 기와지붕' 같은 건물이 바로 시스티나 예배당이다.

 

 

 

1481년에 완성된 이 성당은, 건물 자체는 평범하지만 전세계에서 해마다 4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이다. 그 이유는 이곳이 교황선출을 위한 '콘클라베'가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가 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최고의 걸작이라 인정받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내부

<천장화>와 <제단화> 모두 미켈란젤로가 그렸다!

 

 

 

 

1508년,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로부터 이 작품을 의뢰받은 33세의 미켈란젤로는 1512년까지 4년간의

노력끝에 감동의 대작을 완성하였다. 사람들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저 그림을 보며 종교의 위력과 

기독교의 성스러움을 느끼며 경건해한다.

 

 

 

 

 

 

그런데!!

 

정작 저 그림을 그린 미켈란젤로는

 

교황에 대한 증오와

 

기독교에 대한 회의로 가득차 있었다고 하는데....

 

 

 

 

 

 

당당시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1443~1513) / 라파엘로가 그린 초상화

그는 '로베레' 가문 출신인데 '로베레'는 이탈리아어로 '참나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참나무 열매인 '도토리'로 장식된 의자에 앉아 있다.

 

 

 

 

시스티나 천장화에도 참나무와 도토리를 든 도우미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물론 이 작품의 의뢰인을 밝히려는 의도이다.

 

 

 

 

 

<다비드>가 완성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505년 초,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다시

로마로 돌아온다. 그리고 율리우스 2세의 '기념묘비'를 만들기로 계약한다.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생전에 미리 거대규모의 무덤을 만들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아랫사람들을 툭하면 두들겨패는 이 '폭군' 교황을 위해 미켈란젤로는 헌신했다. 먼 지방까지 내려가

수 개월간 머물며 대리석을 직접 주문하고 올 정도였다. 그런데 그 대리석을 실은 배가 들어오기도 전에 

교황의 '영묘제작 프로젝트'는 중단되고 만다. 그 자금으로 성베드로 성당을 개축해야겠다고 교황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어 버린 것이다. 순간 빚에 쪼들리게 된 미켈란젤로는 급한 운송비라도 해결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충격과 절망 끝에 급기야 1506년 4월, 몰래 로마에서 도망쳐버렸다. 

 

피렌체에 숨어있던 미켈란젤로는 수차례 강제명령 끝에 1506년 말, 다시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가

볼로냐에서 화해하였고 1508년 5월 10일, 마침내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제작이라는 새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되었다.

 

 

 

 

이런 에피소드에서 보듯

교황과 미켈란젤로는

'개와 고양이' 사이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미켈란젤로는

천장화 속에서 몰래 교황을 비웃었다고 한다.

 

 

 

 

 

 

다음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천장화의 일부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인 '스가랴'라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예배당 '교황 출입문'의 바로 위, 매우 중요한 위치에 그려졌다. 본래 율리우스 2세는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그려달라고 했다는데... 미켈란젤로는 그에 비해 전혀 유명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인물을 그려넣은 것이다. 도대체 왜? ... 어떻게??

 

 

 

 

  

 아까와는 반대편에서 본 시스티나 예배당의 내부

울타리 가운데가 교황의 출입문이고, 그 수직 위 삼각벽 사이에 '스가랴'가 조그맣게 보인다.

 

 

 

 

자기 말을 안 듣고 다른 그림을 그려넣은 걸 보고, 평소 교황 같았으면 미켈란젤로를 때렸을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아무 일도 없었다. 왜냐하면 '스가랴'의 얼굴이 바로 교황의 초상화였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려질 자리에 대신 들어간 율리우스 2세

오똑한 콧날과 눈매, 흰 수염이 특징이다. 저 위에 있는 초상화와 비교해 볼 것. 

 

 

 

 

교황은 아마, 오히려 기뻐하며 크게 웃었을 것이다.

 

그 뒤의 '숨은 그림'은 발견하지 못한 채....

 

 

 

 

 

 스가랴의 자리에 앉아있는 교황한테 손으로 '엿먹어라'는 제스쳐를 날리고 있는 꼬마 천사

 

 

 

"단테의 작품에도 묘사되어 있는 이 손가락질은

엄지손가락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어넣고 내미는 경멸의 동작으로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에서는 여전히 욕으로 통한다"

 

- 로스 킹,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천장> (신영화 옮김, 다다북스, 2007), p.238

 

 

 

 

 그림이 너무 작아서, 그리고 

아마도 일부러, 엄지 손가락을 파묻히게 그려서

사람들은 저 그림을 잘 몰라 보았을 것이다.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고대 로마의 '쿠마에'라는 지방에 한 무녀(巫女)가 있었다. 그녀는 '미래에 한 아기가 태어나 이 세상을 황금시대로 되돌릴 것이다'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 아기를 예수로 해석했는데, 미켈란젤로 시대에 이르러 '에지디오(Aegidius of Viterbo, 1469~1532)' 라는 설교가가 나타나 난데없이 '새로운 황금시대를 열 인물은 율리우스 2세 교황'이라고 선언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은 입이 찢어졌을 것이고 '쿠마에의 무녀'도 좋아하게 됐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시스티나 천장화 가운데에도 쿠마에의 무녀가 그려져 있다.

 

   

 

다만,

남들은 그녀를 다 예쁘게 그리는데...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치노(Domenichino, 1581~1641)가 그린 <쿠마에의 무녀> (1617)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추한 할멈'으로 그려놨다!!

 

 

 

 

 

 

 

 

 

 

교황이 좋아하는 걸 알고 

 

일부러 이따위로 그린거겠지?

 

 

 

 

 

심지어...  

 

 

여기에서도 어린 천사들이 '못된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저 고사리 같은 손이보이시죠? ㅋㅋ

 

 

 

 

 

 

 

 

 

여기까진 애교로 봐줄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천장화 가운데에는 

 

기독교 교리에 위배되는 사상에 경도된 요소들도 많다는 것!

 

 

 

 

 

 

이쯤에서 책 소개를 하나 해야겠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비밀>이라는 책이다.

 

 

 

 

 

 벤저민 블레흐 로이 돌리너, <시스티나 예배당의 비밀>, (김석희 옮김, 중앙북스, 2008)

 

 

 

벤저민 블레흐라는 사람은 유대교 랍비(율법학자)이자 교수로, 지난 2005년 전세계의 유대인을 대표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역사적인 접견에 초대된 세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이 저명한 유대교 학자가 시스티나 천장화에 대한 충격적인 해석을 해서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책의 주제는 단순하고 확고하다.

미켈란젤로는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천장화를 그렸다는 것!

 

 

 

 

 

미켈란젤로가 10대 후반의 3년 간을 메디치 저택에서 양자로 보내며 신플라톤주의, 헤르메스주의, 유대교 사상 등을 배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메디치 가문은 유대사회와 헤르메스 사상을 새롭게 부흥시킨 주역이었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후 미켈란젤로는 타락한 교황들과 교회에 진저리를 내게 되었고, 자신이 선호하는 유대교 사상을 그림 곳곳에 숨겨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수많은 예를 드는데...

 

 

 

솔직히

 

유대교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우리들로서는 알아듣기 힘들다.

 

 

 

 

다만, 그 동안 미처 몰랐던 주목할 사실은... 시스티나 예배당이 애초에  '솔로몬의 성전'을 베껴서 만들었다는 점이다!

 

유대교의 기본 교리 가운데 하나는, 예루살렘의 '성전산(Temple Mount)'외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솔로몬 성전을 본떠 지어놓고 신전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탈무드, 메길라 10a)그리하여 유대인들은 그것을 그리워하기만 할 뿐 새로 짓지 못하고 있었는데... 자신들을 핍박해 왔던 로마 가톨릭에서 그것과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교회를 지은 것이다.

 

 

 

 

성베드로 성당에서 내려다본 시스티나 예배당

성경에 표시된 치수를 따라,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와 똑같은 크기인, 길이 40.9미터, 너비 13.4미터로 지었다 

 

 

 

 

 

 

이러한 비밀을 알고 있던 미켈란젤로는

일부러 유대교 정신을 계승해 

가톨릭 세계에 대한 반감을 표명했다는 것이다.

 

 

 

 

"이 천장화가 그렇게 가톨릭적인 작품이라면

왜 300명이 넘는 인물들 가운데 기독교인은 단 한 사람도 없을까?

아브라함에서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 이르기까지

예배당 안을 뛰어다니는 유명인 가운데 기독교적인 것은 전혀 없다.

기독교적인 상징이나 형상도 전혀 없다. 

천장화의 5%는 이교의 상징이고

나머지 95%는 유대교적인 주제와 주인공들뿐이다."

 

- <시스티나 예배당의 비밀> 중에서 

 

 

 

 

 

 

이 설명은 100% 맞는 이야기다.

 

천장화 가운데 '신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은 단 한 명도 없다!

 

 

 

 

 

 

 

 

 

이제 

'아담과 이브'를 보자.

 

 

 

시스티나 천장화 가운데 <이브의 창조>

여호와가 아담으로부터 이브를 만들어내고 있는 장면

 

 

일반인들도 잘 알고 있는 것 처럼, 성경에는 여호와가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살로 채워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창세기 2:21-23) 하지만 유대교의 히브리 성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이브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그에 따라 아담의 옆구리에서 걸어나오는 이브를 그렸다고 한다.

 

 

 

한편

 

뱀이 꼬셔서 이브와 아담이 먹었다고 하는 '선악과'는 어떤 열매였을까?    

 

우리는 당연히 '사과'라고 알고 있는데...

 

 

  

 

 

독일의 뒤러가 그린 아담과 이브> (1507)

당연한듯, 자연스럽게 사과를 들고 있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어떻게 그렸을까?

 

 

 

 

 

 

 

 

 

 

헉!

 

 

쫌... 이상하다?!

 

 

  

 

 시스티나 천장화 가운데 <낙원 추방>

 열매는 너무 작아 안 보이는데, 이파리를 보니 확실히 사과는 아닌 것 같다.

 

 

 

 

 

 

 

 

저것은 바로...

 

 

무.화.과!

 

 

 

 

세 갈래 같기도 하고, 다섯 갈래 같기도 한 독특한 모양의 이파리에 주목할 것! 

 

 

 

금단의 열매가 사과로 여겨진 건 본래부터 오역이었다고 많은 학자들은 이야기 한다. '악(惡)'을 뜻하는 'malum'이란 단어가 라틴어의 '사과(malus)'와 같은 말이라 '선과'를 이야기 하는 대목에서 아무 생각없이 '사과'라고 잘못 번역됐다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금지된 '동산 중앙의 나무'를 무화과 나무로 해석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미켈란젤로는 무화과 나무를 그려넣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뱀을 '릴리트(Lilith)'의 모습으로 그려낸 것도

유대인들에게서 비롯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릴리트는 유대신화에 나오는 아담의 첫번째 부인으로

이브보다 앞서는 인류 최초의 여자이다. 

 

 

 

     

영국화가 존 콜리어(John Collier)가 그린 (1892)

 

 

 

 

 

 

 

미켈란젤로의 '이단성'에 대한 또 다른 논의가 있다. 이번에는 그의 <시스티나 제단화>와 관련된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벽면에 그린 제단화 <최후의 심판>

이것은 '천장화'를 완성한지 22년이 지나고, 새 교황의 의뢰로 새로 제작한 작품이다. (1541년 완성)

 

 

 

 

1541년 10월 31일, 이 작품이 공식적으로 개봉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단 작품 속 인물들이 모두 나체였기 때문이다. (그후 1564년,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으로 옷이나 천으로 덧그림이 입혀졌다고 함) 그리고 보면 볼수록 이교도적 색채가 강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이 전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잡신들 이미지였던 것이다.

   

 

 

중앙에 그려진 예수 그리스도도 처음에는 완전히 알몸이었다고 한다.

죄지은 자들을 마지막으로 심판하기 위해 당당하게 내려오는 모습... 

 

 

 

 

 

 

그런데...

 

 

 

수염도 없고, 몸매도 우락부락한 모습이 굉장히 낯설다...

 

 

 

 

 

 

 

여기에 대해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저 모습은 그리스 조각품 2개를 합성한 것이다.

그 둘은 모두 미켈란젤로가 좋아했던 명작들로

현재 같은 곳에 전시되어 있다.  

 

 

 

 

 

 

 얼굴은 바로 이 작품, <벨베데레의 아폴론>을 베낀 것이라고 한다.

 

 

 

 

 

 

 

  몸통은 바로 이 작품, <벨베데레의 토로소>를 베낀 것이라고 한다.

 미켈란젤로가 하도 좋아해서 <미켈란젤로의 토로소>라는 별명이 붙어있다고 한다.

 

 

 

 

이 둘은 모두 바티칸 미술관 내 '벨베데레의 정원'에 있다.

 

 

 

 

 

그러고보니 벨베데레의 정원에는 또 하나의 유명한 작품이 있다.

 

바로...

 

 

 

 

 <라오콘 군상> (BC150~ BC50년경)

 

'트로이 전쟁' 당시 트로이의 고위사제 라오콘이 '트로이의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그 순간 뱀들이 나타나 라오콘과 두 아들을 죽이는 장면이다.

 

 

 

 

 

실은 이 작품도 미켈란젤로와 깊은 관련이 있다.

 

 

<라오콘>은 본래 전설로만 전해지던 예술품이었는데 1506년 초, 로마의 한 농부가 콜로세움 근처의 포도밭에서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그 발굴작업을 담당했던 이가 바로 미켈란젤로였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라오콘>이 아예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최근 등장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의 미술사학과의 린 카터슨(Lynn Catterson)이라는 강사의 2005년 4월 6일 강의내용이다.

 

 

당시 강의 포스터

<라오콘>의 뒷모습에 주목하라... 

 

 

그녀의 주장은 심히 황당하다. <라오콘>은 고대의 미술품이 아니고 미켈란젤로가 직접 만들어 땅 속에묻어놓았던 '자작극' 소품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이 가짜(?) 예술품을 우연히 발굴한 것처럼 꾸민 뒤 비싼 값으로 팔려는 계획을 가졌으리라는 예측이다. 린 카터슨에 따르면 라오콘이 발견되기 5년 전인 1501년에 미켈란젤로가 남자의 벗은 몸을 스케치 해 둔 것이 발견됐는데, 그것이 <라오콘>의 뒷모습과 똑같다고 한다. 다시 말해 미켈란젤로가 미리 연습을 충분히 한 뒤 <라오콘>을 만들었고, 그것을 땅에 묻고는 우연히 발견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원 세상에...

 

 

 

 

말도 안 돼!!   

 

 

 

 

 

 

 

...라고 비웃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주장에 많이 동의한다.

 

 

 

 

 

꽤액~!!!

 

 

 

 

 

 

일단 라오콘이 발견된 시점이 너무 절묘하지 않은가?

   

 1506년 초는 미켈란젤로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해 있을 때였다. 

(대리석은 잔뜩 주문해 놓았는데, 계약은 날라가고... 오죽하면 도망까지 갔을까?)

하필 그때 짠~하고, 그것도 미켈란젤로의 옆동네에서 갑자기 이 보물이 나타난 것이다.

 

결국 도망치기 전까지 그가 로마에 머문 기간은 1년 미만,

그 가운데 8개월은 '카라라' 지방에서 대리석을 구하며 보냈다.

그렇다면 그가 실제 로마에 있었던 시간은 채 4개월이 안 될텐데

1600년 이상을 땅 속에 묻혀있던 <라오콘>이 어쩌면 딱, 그때에 발견될 걸까?    

 

 

 

 

 

교황은 큰 돈을 치르고 이 작품을 사고 

(혹시 미켈란젤로한테 산 건 아닐까? ^^)

시내를 돌면서 퍼레이들를 벌인 뒤

교황청 안마당에 고이 모셔 두었다.

 그리고 이 조각상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들끓자

교황은 개인수집품을 공개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품 컬렉션인

'바티칸 미술관'의 시초이다.

 

 

 

 

 

 

사실 내가 의심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라오콘>의 우락부락한 근육들이

 

 

미켈란젤로의 것과 너무도 닮아 있다는 점이다!!   

 

 

 

 

 

 여자의 몸도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덮어버리는 미켈란젤로의 병적인 집착....

 

 

만약 당시에 <라오콘>을 가져다 놓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다면

로마시민의 99.9%가 그것을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은 모두

견과류가 잔뜩 들어있는 자루를 보는 것 같다니까..."

 

- 레오나르도 다빈치

 

 

 

 

 

 

 

 

 

 

 

 

 

 

 

오늘도

 

 

 

내일도

 

 

 

미켈란젤로의 수수께끼는

 

 

 

끝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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